
나는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을 AI로 만들어 쓰고 있다. 그러다 알게 된 게 있다. 내가 원하는 폰트 디자인과 전체 레이아웃 스타일이 몇 개 안 된다는 것이다. 실은 그냥 깔끔하고 눈에 잘 들어오는 것이 중요하고, 사용자 경험이 더 중요하다. 그보다 더 나아져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까지 디자인이 중요했던 사람이 아니라 핵심 내용이 중요했던 사람이니까.
나는 패션, 즉 옷이며 가방 같은 것들의 디자인이나 브랜드에 별로 관심이 없다. 엄밀히 말해 디자인은 나 같은 사람을 위한 게 아니다. 나는 결국 디자인에 제대로 값을 치른 적이 없는 사람이니, 디자인 업계의 관점에서 보면 타깃 고객조차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AI로 이것저것 만들다 보니 결국 내가 만드는 것들의 디자인이 세계 평균, 즉 AI가 학습한 방식이자 실무에서 가장 많이 쓰는 평균 지점으로 수렴하는 것 같다. 나는 이 정도에서 만족한다. 하지만 정말 디자인 그 자체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다르다. 매우 사소한 특징 하나를 잡아내서 그걸로 구입 여부를 결정해 버린다. 그만큼 디자인에 대한 감성이 남다르다고 할 수도 있고, 취향이 섬세하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애초에 조금만 구식이다 싶은 디자인이면 마음에 안 든다고 버리고 새로 산다. 이 사람들의 수요는 늘 꾸준했다. 그리고 디자인 업계의 진짜 고객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AI 시대에 이런 사람들을 붙잡는 일은 오히려 점점 더 어려운 과제가 될 것 같다. AI가 평균적인 방식으로는 만들어내기 어려운 걸 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AI로 딸깍하고 만든 디자인은 이런 사람들의 선택을 받기가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AI가 발전하는 것만큼 인간의 취향도 같이 발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명품 제품들의 디자인은 모두 더 좋은 것, 더 나은 것이라 생각해왔다. 그런데 그건 어쩌면 선택지가 많지 않던 구시대, 즉 명품과 평범한 디자인으로 단순히 나뉘던, 단순한 취향만 반영한 제품밖에 없던 시대의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자기 취향이 아닌데도 선택지가 없으니 스스로에게 강요한 결과라는 의미다.
소위 패션의 도시로 유명한 도쿄나 뉴욕,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밀라노 같은 곳의 중심가에 가 보면 사람들이 멋진 명품 옷만 입고 다니는 게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제멋대로 입는다. 단정하고 고급스러운 차림도 물론 있겠지만 동네 마실 나오듯이 후줄근한 차림, 만화 주인공이 지면에서 튀어나온 듯한 옷차림, 사회에 적개심과 불만이 가득해 보이는 옷차림까지 정말 다양하다. 패션의 도시라는 말은 그만큼 디자인이 다양하거나 명품이 많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기 취향대로 자신을 마음껏 드러내는 방식으로 자유롭게 입고 다녀도 아무도 뭐라 하거나 눈치 주지 않는 도시라는 의미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다.
이제까지 우리는 '값싼 취향', '명품 취향'같이 취향 자체도 몇 개 안 되는 평가 기준으로 점수를 매겨 구분해 왔다. 마치 미술관에서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은 예술적 감성이 무딘 사람이라는 식으로 무시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고 보면 그냥 돈 내는 사람이 정답이다. 소위 '싼마이 취향'인 사람이 싼마이 디자인 제품에 돈을 내는 걸 무슨 수로 막을까. 그리고 애초에 싼마이 취향이라는 것도 우스운데, 복고를 비롯해 구시대적인 디자인은 시간이 한참 지난 후 오히려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며 사람들에게 정서적 공감을 일으킬 수 있다. 일부러 싼마이스럽고 촌스러운 디자인을 골라 그 특유의 유머러스한 감성을 즐기는 사람도 많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은 아직까지도 스스로의 취향을 잘 모른 채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 점점 더 많은 디자이너들이 더 다양한 취향의 디자인을 만들어낼 것이고,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다양한 각자만의 취향을 계발하게 될 것 같다. 그만큼 디자인의 세계에 정답이라는 것도 사라지고 어떤 디자인이 더 낫다는 기준도 희미해지지 않을까 싶다.
즉 AI가 발전하는 만큼 디자인도 점점 더 다양한 취향의 그릇을 담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고, 사람들의 취향 자체도 그만큼 다변화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취향을 마음껏 계발하고 표현하는 사람들은 점점 AI가 만들어준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된다. AI가 지구상의 디자인을 학습하고 이것저것 덧붙여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속도보다, 사람들이 그런 디자인에서 AI의 흔적을 발견하고 쉽게 질리는 속도가 더 빠르다. AI보다 인간이 더 고도로 진화한 지점이 바로 여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탑급 디자이너들의 몸값은 올라가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탑급 디자이너라는 것은 지금까지의 시대에만 존재할 수 있었던 개념이다. 취향이 제멋대로, 실시간으로 진화하는 시대엔 디자인 감각이 뛰어난 누군가가 계속해서 히트할 수는 없고, 오랜 기간 별 볼 일 없는 디자인만 하던 사람도 우연한 계기로 히트를 칠 수도 있다. 그리고 누가 히트를 치든 그것은 결코 오래갈 수 없다.
오래전 유행했던 기안84의 만화. 작은 예시지만 성공한 만화가인 것과 상관없이 그의 그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기안84의 만화가 잘 그린 그림인가? 사실 만화야말로 취향이 그대로 드러나는 영역이다. 인체 비례를 정밀하게 짜고 색감을 고도화하는 것은 만화의 성공 여부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애초에 만화에서 잘 그린 그림이란 그냥 그 만화와 잘 어울리는 그림체다. 기안84의 만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잘 그린 그림인지를 따지는 건 의미가 없고, 스토리 속 주인공의 인간적인 면모가 잘 드러나는 그림이었달까. 인체 비례며 색이며 연출이며, 정말 잘 그린 그림은 세상에 넘쳐난다. 하지만 누군가의 취향을 담는 그림은 의외로 그리 많지 않다.
예전까지 우리는 이런 것을 너무 강요했다. '좋은 디자인', '명품 디자인', '잘 그린 그림'. 그런데 인간이 AI가 정확하게 계산한 그림보다 더 뛰어난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시대엔, 어떻게든 인간의 감정과 흔적을 담은 그림이 각각의 취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게 되지 않을까 싶다. 즉 디자인의 평가 기준 자체가 희미해지고, 그 자리에 각자의 무시할 수 없는 취향만이 남는다는 의미다.
디자이너는 아니지만, 그래서 나는 오히려 앞으로 디자인을 하는 사람들이 디자인 외적인 활동을 많이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특히 사람과 소통하고 많은 경험을 하면서 스스로의 내면에 자기 욕망을 채우는 경험, 자신만의 인생 스토리를 쌓아가는 과정 말이다. 이건 디자인뿐 아니라 다른 모든 분야에도 적용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앞으로는 점점 더, 뭉뚱그려 말하는 대중의 유행보다 주체적인 개개인의 취향이 더 중요해지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