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은 그런 사람들이 드물지만, 과거 의료 관련 직업인들 중엔 환자에게 권위주의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의사뿐 아니라 간호사, 약사, 심지어 헬스장 트레이너나 비공식적으로 활동하는 건강 관련 종사자들까지 마찬가지였다. 어느 정도 기선 제압(?)을 해서 환자를 의존적으로 만들어야 뭔가 더 많이 팔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물론 있었다. 한국 특유의 권위주의 문화도 한몫했다.
환자를 아랫사람처럼 다루는 것은 온정주의적 권위, 그러니까 전문가가 환자를 대신해 판단해 주려는 태도라 할 수 있다. 서구에서 먼저 나타난 이 흐름이 우리나라에서는 원래 있던 한국 특유의 권위주의 문화와 결합해, 의료인이 환자를 손쉽게 다루는(?)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요즘은 그런 의료인들이 사라지고 있는데, 이는 사람들의 의식 수준이 높아졌고, 의료 서비스를 찾는 환자들 역시 자기 건강 문제에 대한 지식이 많이 늘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유튜브 같은 곳에는 '무슨무슨 증상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무조건 이것 하세요' 라는 식의, 몸과 마음에 생긴 온갖 질병을 한순간에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말하는 의료인들이 있다. 검색 노출과 클릭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겠지만, 사람의 몸과 마음만큼 복잡한 것이 또 없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한편으로 씁쓸해지곤 한다.
가벼운 상처나 계절마다 걸리는 감기 같은 것은 치료제나 증상 완화제가 잘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현대인이 겪는 질병들은 점점 더 누구 하나 특정한 해결사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문제가 얽혀 있다. 늘어나는 비만, 우울, 불안 같은 문제들은 혹을 떼어내듯 뚜렷하게 제거할 질병이라 하기도 애매하거니와, 그 원인을 찾아 해결하기가 무척 어렵다. 어떤 사람이 먹고살기 위해 다니기 싫은 직장에서 인간관계로 스트레스를 받아 쉽게 불안해지고 우울해지는데, 그것을 풀기 위해 달고 기름진 음식과 술을 자주 먹어 비만과 성인병을 달고 산다면? 여기에 '스트레스를 받지 말고 식습관을 고치세요' 라고 조언한다면, 그것은 문제의 근본 원인을 가린 채 개인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의료화는 원래 의료의 영역이 아니던 문제들이 점차 질병이나 장애로 규정되어 치료와 관리의 대상이 되어 가는 과정을 뜻한다. 그런데 의료화의 과정에서 개인에게 나타난 문제들을 환경이나 사회 문제, 개인이 처한 상황과 상관 없이 그저 질병의 문제로 바꾸는 부작용이 나타나곤 한다. 돈 벌기 위해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는 상황, 값싸고 자극적인 음식으로 가득한 환경, 쉴 틈을 주지 않는 사회에서 비롯된 문제를 그저 개인의 생활 습관 문제 혹은 병원에서 약먹고 치료할 질병 문제 수준으로 축소시켜 버리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특히 의료 전문가의 권위를 과하게 인정하는 측면이 있다. 어떤 사람의 건강 문제를 풀기 위해 전문가의 진단과 치료, 조언이 중요한 것은 분명하지만 전문가라고 해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몸의 생물학적 기전이나 치료 기술의 원리는 더 잘 알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 — 그 사람이 왜 그런 병을 달고 살 수밖에 없는지 — 까지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모든 정제당과 초가공식품, 술과 담배를 없앤다면 어떨까? 모두가 건강해지지 않을까? 불가능한 가정이라는 걸 누구나 안다. 그런데 개인의 생활습관 탓으로 돌리는 것 역시, 불가능한 가정을 탓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전문가에 대한 의존을 조금 낮추고, 자기 건강의 최종 결정권자는 자기 자신이라는 인식을 넓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즉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부할지, 어떤 조언을 자기 삶에 적용할지를 스스로 정한다는 의미의 자기 건강 결정권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병을 안고 살아갈 방식을 개인이 정하는 일은 개인의 몫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의료 정보와 지식을 찾아 자기 몸에 적용해 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잘못된 정보로 좋지 않은 결과를 겪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것 역시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을 행사한 결과다. 전문가의 의견을 따르지 않는 것도, 자기 몸을 자기 방식으로 관리하는 것도 그 자체로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과거에 의료 전문가의 권위가 지금보다 강했던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의료 지식과 정보에 대한 사람들의 접근성이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이 낮았고, 경험을 나눌 플랫폼도 없었다.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격차가 압도적이었으니 판단을 통째로 맡기는 것이 합리적이기도 했다. 그 시절에는 잘못된 의료 정보가 실제로 더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었다. 지금은 그 격차가 많이 줄었고, 그만큼 관계도 달라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물론 여기에는 두 가지 단서가 붙는다. 하나는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이 타인의 건강까지 좌우하는 지점 — 감염병처럼 — 에서는 같은 논리가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다른 하나가 더 중요한데, 스스로 공부하고 판단하는 일에는 시간과 여유, 그리고 정보를 가려낼 훈련이 필요하다. 그런 여건은 모두에게 고르게 주어져 있지 않다. 결정권을 넓혀야 한다는 말은 결국 각자 알아서 하라는 말이 아니라, 각자가 판단할 수 있도록 정보와 여건을 함께 넓혀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1990년대 초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환자교육연구센터에서는 만성질환 자가관리 프로그램(CDSMP)을 만들었다. 한마디로 질병을 가진 사람이 자기 질병의 관리와 치료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도록 돕는 프로그램이었다. 비슷한 발상이 영국으로 건너가 1999년 정부 백서에서 '전문가 환자'라는 이름으로 처음 제시되었고, 2001년 보건부 보고서를 통해 구체화되었다. 환자 스스로 자기 질환을 공부하고 교육을 받으며, 같은 질환을 가진 사람들과 그 내용을 나누고, 치료 과정에 적극적으로 관여한다는 개념이다. 의료 전문가의 권위가 강한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개념이기도 하다.
'비만'이 공식 질환으로 규정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렇게 점점 더 많은 몸 상태가 질병으로 규정되는 한편으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질환을 반드시 물리쳐야 할 혹이 아니라 관리하며 함께 살아가는 무엇으로 받아들이는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환자'라는 말의 뜻 자체가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자칫 전문가에게 조금 덜 기대고 스스로 판단하자는 말로 들릴 수 있다. 그런데 조금만 둘러보면 이것은 이미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사회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판단도 개인의 몫, 결과도 개인의 몫이라는 쪽으로 넘어가고 있다. 이미 사회는 개인주의로 넘어가 스스로에 대한 책임을 더 지우고 있는데, 과도기 사회에서 많은 이들이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커리어도, 노후도, 관계도 그렇게 되고 있다. 건강이라고 예외일 리 없다.
문제는 개인에게 넘어오고 있는 것이 책임뿐이라는 데 있다. 건강을 위한 결정의 결과는 이미 개인이 모든 것을 감당하게 되었는데, 권위는 여전히 의료 전문가에게 남아 있다. 원래 권위와 책임은 함께 움직여야 한다. 책임만 오면 피해를 입어도 호소할 곳이 없다. 판단을 대신해 주는 쪽이 그 판단의 결과까지 함께 지는 것, 그것이 과거 의료에서 온정주의적 권위가 성립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조건은 희미해지고 있다. 한마디로 책임은 이미 개인에게 넘어갔지만 의료 전문가의 권위는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라는 의미다.
예를 들어 이런 장면을 생각해 보자. 비만으로 병원을 찾은 사람이 있다. 의사는 비만 치료 주사를 처방하고, 식단을 관리하고 운동도 하시라는 말을 덧붙인다. 약은 약대로 물론 어느정도 효과가 있다. 식단관리와 운동도 물론 상식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런데 정작 그 사람이 왜 밤마다 그렇게 먹게 되었는지 — 야근이 몇 시에 끝나는지, 그 시간에 먹는 것 말고 무슨 낙이 있는지, 그 일을 줄이거나 그만둘 수 있는 형편인지 — 에 대해서는 어차피 의사는 잘 모르고 관심도 없다. 의사가 무심해서라기보다, 애초에 그 문제는 의료의 문제조차 아니기 때문이다. 어디서나 비슷한 조언이 앵무새처럼 반복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환자 쪽은 어떨까. 전문가에게 처방을 받았으니 문제가 일단 처리되었다고 느끼기 쉽다. 그래서 정작 건강 문제 해소를 위해 근본적으로 던져야 할 질문 — 나는 이 생활을 어디까지 견딜 것인가, 무엇을 줄이고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나를 이렇게 만든 그 일에서 어느 정도까지 벗어날 수 있는가 등등 — 은 사라진다. 권위가 의료인에게 남아 있는 한 그 질문을 개인 스스로 던져야 한다고 생각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달 뒤 체중이 돌아오면, 그때는 다시 의지가 약했다거나 치료에 순응하지 않았다, 의사 조언을 무시했다는 말만 듣게 될 뿐이다.
그러니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을 이야기하는 것은 낭만적인 주장이라기보다 오히려 시대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의무에 가깝다. 어차피 자기 건강에 대한 책임이 개인으로 넘어왔고, 그 시대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이상, 판단과 결정권의 권한까지 함께 따라오지 않으면 개인에게는 가장 나쁜 조합만 남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전문가의 말을 무시하라는 뜻도 아니다. 자기 몸에 대한 최종 책임자로서 전문가의 의견과 치료도 당연히 따르되, 자기 인생의 모든 맥락을 고려해 스스로의 건강을 위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자기 자신 뿐이라는 의미다.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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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ulet L.. The Expert Patient and Chronic Respiratory Diseases. Canadian Respiratory Journal. 2016;2016:1-6. doi: 10.1155/2016/9454506